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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 한국외국어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부산 일본총영사관 앞에 한 노동단체가 ‘강제징용 노동자상(像)’을 세우겠다고 하여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에 갈등이 증폭되고 있다. 이곳은 이미 지난해 말에 ‘평화의 소녀상’ 건립을 둘러싸고 한·일 정부가 심한 외교적 마찰을 빚은 곳이기도 하다. 강제징용 노동자상은 이미 서울 용산역과 인천 부평에 세워졌고, 경남과 제주 등지로도 확산되는 추세다. 이러한 가운데 국내 정치권도 이 문제에 대해 사분오열해 북핵 문제로 가뜩이나 어려운 정국에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일제강점기의 강제징용은 군대위안부 문제와 함께 과거 일본 정부의 대표적 인권유린 행위로, 이를 철저히 규명하고 피해자들에 대한 충분한 사과와 보상이 이뤄졌어야만 했던 사안이다. 그런데도 올해로 광복 72주년을 맞았지만 아직까지 납득할 만한 수준의 해결이 되지 않아 국민 정서 속에 응어리로 남아 있는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늦는 감은 있지만, 일제강점기의 만행을 알리고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는 노동단체의 주장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다만, 이러한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강제징용 노동자상을 이 시기에 굳이 일본 공관 바로 앞에 세워야 하는지에 대해선 몇 가지 점에서 우려된다.

첫째, 강제징용 노동자상은 서울 용산역과 인천 부평에 이미 세웠고, 서울 종로구 주한일본대사관 건너편의 ‘평화의 소녀상’ 옆에도 동상 설치를 추진하고 있다. 또한, 양대 노총으로 구성된 ‘강제징용 노동자상 건립 추진위원회’가 이처럼 강제징용 노동자 문제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해결을 촉구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하지만 외국 공관 정면에 이런 조형물을 세우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지난해 부산 일본총영사관 앞 소녀상 설치 때도 일본 정부는 부산 총영사를 본국으로 소환해 한·일 간에 외교적 갈등과 혼란이 지속된 적이 있다. 또, 한국도 1961년에 가입한 ‘외교관계에 관한 빈 협약’(제22조 2항) 역시 ‘외국 공관의 안녕을 교란하거나 품위를 손상하는 행위를 방지하기 위해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규정해 이를 금지하고 있다.

둘째, 그 앞에 강제징용 노동자상 설치를 추진하고 있는 부산 일본영사관의 경우 지난해 연말 시민단체가 평화의 소녀상을 설치한 곳인데, 그때 그 지자체는 ‘도로교통법 위반’이라며 소녀상을 철거했다가 비난 여론에 부닥치자 소녀상 설치를 묵인해 일본 정부의 강한 반발을 산 적이 있다. 또한, 당시 우리 외교부 장관은 ‘외국 공관 앞에 논란이 되는 조형물을 설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발언을 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한·일 과거사 문제 해결을 둘러싸고 더 이상 국론이 분열되거나 행정이 갈팡질팡하는 아마추어리즘으로는 설득력이 부족하고 문제 해결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셋째, 언제까지나 이러한 과거사에 매몰돼 사사건건 일본과 감정적으로 대립하는 것은 국익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특히, 요즘처럼 북핵 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한·일 양국의 긴밀한 공조가 필요한 시점에 두 나라가 외교적 갈등과 반목이 지속되는 일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최근 문재인 대통령이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에서 ‘양국이 과거사 문제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면서 미래 지향적이고 실질적인 교류와 협력을 강화해 나가기로 한다’고 한 발언은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을 함축하고 있다. 성숙한 시민의식으로 일본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실리를 추구할 수 있도록 지혜를 모으는 데 정부가 나설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