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사회역학자 김승섭 고려대 교수는 “사회적으로 연결될수록 오래 산다는 연구결과가 속속 나온다”며 “타인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는 공동체가 건강하다”고 말한다. 동아시아 제공

- 국내 ‘사회疫學’ 개척…‘아픔이…’ 펴낸 김승섭 고려대 교수

연대 의대 나와 의사 길 접고
국내외에서 생소한 분야 연구

사회환경과 단절된 病은 없어
세월호 가족·해고노동자 등
현장의 아픔·상처 함께하며
사회적 원인·공동체 책임 찾아

“질병 원인의 원인을 추적하는 게 ‘사회 역학’입니다. 사회적 환경과 완전히 단절돼 진행되는 병은 없습니다.” 국내에서 아직 생소한 ‘사회 역학(Social Epidemiology)’. 여기서 ‘역학’은 보건의료의 역학(疫學)을 말한다. 하버드대를 비롯해 세계 유수의 대학에서 이 분야 박사학위를 주기 시작한 게 10여 년밖에 안 될 만큼 최근에야 독립 학문으로 자리 잡았다.

하버드대 보건대학원에서 한국인으로 처음 이 분야 박사학위를 받은 김승섭(38) 고려대 보건과학대학 교수는 국내에 몇 안 되는 사회역학자(social epidemiologist) 중에도 손에 꼽을 만한 젊은 학자다. 학위뿐만이 아니고, 김 교수는 그동안 세월호 사고의 단원고 학생 생존자와 가족, 소방공무원,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성소수자 등 ‘사회 역학’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사람과 현장에서 함께하며 이들의 상처와 질환에 대한 ‘원인의 원인’을 연구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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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의대를 나와 의사의 길을 접고 개척 분야를 택한 김 교수는 그동안 사회역학자로서 피하기 어려웠던 고민과 연구의 발자취를 담은 책 ‘아픔이 길이 되려면’(동아시아)을 최근 펴냈다. 사회 역학에 관련한 이론과 사례가 녹아있는 국내 학자의 첫 저서다. 김 교수는 13일 전화인터뷰에서 “우리의 건강에 대해 보통 의료기술을 떠올리지만, 사회 역학은 질병의 사회적 원인을 찾고 공동체의 책임은 어디까지인지를 고민한다”고 설명한다.

예컨대, 1990년대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받은 대부분 동유럽 국가들의 결핵 발생률과 사망률은 각각 14%, 16%가량 증가했다. 이들 국가가 공공의료 등의 지출을 제한한 구조조정 프로그램에서 빠져나가자 결핵 사망률은 31%나 줄었다. 또 2000년에 인구의 29%가 HIV 감염인이었던 남아프리카공화국 콰줄루나탈 지역의 성인 기대수명은 52.3세로 이 나라의 평균 61.4세보다 9년이나 낮았다. 나중에 국가가 공공 의료보험으로 HIV 치료약을 제공하자 7년 만에 기대수명이 12년이나 증가했다. 김 교수는 “이런 원인은 개개인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병원의 임상진료 과정에서는 알기 어렵다”며 “질병의 사회적·정치적 원인을 탐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김 교수는 또 “가난과 차별, 고용불안, 소수자에 대한 혐오, 학교 폭력 등은 인간의 몸에 분명하게 상처를 남기고 질환을 만든다. 사회 역학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몸과 건강을 어떻게 바라보느냐는 관점의 문제를 제기한다”고 강조했다. 예컨대 김 교수가 노동자 3442명을 대상으로 구직과정에서의 차별 경험과 건강을 묻는 조사에서 ‘해당사항 없음’이란 애매한 답변을 한 여성 노동자들의 건강상태가 ‘있다’‘없다’로 응답한 이들보다 더 나빴다. “차별조차 언급하기 어려운 노동환경의 여성은 더 아플 수밖에 없다”고 김 교수는 분석했다.

또 다문화 가정의 청소년 폭력 대응 유형을 조사한 데 따르면, ‘별다른 생각 없이 그냥 넘어갔다’고 답변한 남학생의 우울증상 유병률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학교폭력에 노출돼도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할 수 없이 상처를 숨긴 다문화 가정 남학생들이 가장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는 걸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책에서 단원고 생존 학생과 쌍용자동차 해고자, 소방대원의 건강 문제 등 자신이 직접 심층 면접을 진행했던 내용은 물론 비정규직의 증가와 자살률, 성소수자와 건강의 관계 등 다양한 국내의 사회 역학 사례를 다룬다.

책이 다루는 ‘아픈’ 내용과 달리 제목은 시(詩)의 제목 같다. 김 교수는 “정치·사회적으로 예민하고 현재 진행형인 주제들이 피해자들과 독자들을 다시 아프게 할까 걱정을 했다”면서 “국가·사회와 기업들도 사회 역학에 대한 인식이 생겨나고 있는 만큼, 누구나 편하게 읽고 문제의식을 같이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엄주엽 선임기자 ejyeob@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