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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띄우는 뜨개질 예찬

기사입력 | 2017-09-08 14:04

김성녀 국립창극단 예술감독

세월이 참으로 빠르기도 하다. 마치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휙 지나간다. 노랫말처럼 그 허리를 붙잡아 친친 동여매 놓을 수도 없다. 지독한 무더위를 무대 위에서 온전히 보낸 지금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 가슴이 서늘해진다.

천고마비(天高馬肥), 풍요로움, 결실, 독서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낱말이 가을을 찬양하는데 나는 마음이 시리다, 사춘기 소녀처럼. 왜인지 모를 먹먹함과 그리움과 서러움이 내 몸을 감싼다. 한없이 착해지고 싶고…, 여려지고 싶고…, 아름다워지고 싶고…. 아∼, 나는 이 나이에도 가을을 타나 보다.

이럴 때 나는 뜨개질을 시작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동네 아줌마들 사이에 끼어 앉아 처음으로 털실을 만지기 시작한 그때가 지금도 가끔 생각난다. 세상으로 향한 문과 창에 빗장을 단단히 걸어 잠근 채 뜨개질 속에 고개를 파묻고 있었을 내 스무 살의 한때가. 그때 내 옆을 흘러 지나가던 세상과 시간은 나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것 같아서 무척 암담했던 시절. 내 인생에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한 채 그저 무심히 손가락을 놀리며 익힌 뜨개질이 세월 훌쩍 흐른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걸 보면 살아가는 일이 참으로 신기한 일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곤 한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여전히 해야 하는 일들로 바쁘다. 내가 하고 싶은 일부터 나를 필요로 하는 일까지 잠시도 멈출 틈 없이 많은 일이 숨 가쁘게 돌아가고 있지만, 숱한 일들 사이에서 틈을 발견하고 그 틈을 채우는 나만의 방법이 바로 뜨개질이다. 털의 감촉과 색의 찬란함에 감탄하고 음미하며 뜨개질을 하노라면 당시의 나는 뜨개질을 하며 무슨 꿈을 꿨었나 더듬듯 기억을 떠올릴 때가 있다. 꿈이라는 걸 꿀 수나 있었을까.

분명한 건 그때의 내가 어렴풋이 생각했던 미래의 내 모습과 지금의 내 모습이 매우 많이 다르다는 사실이다. 그저 하루하루 주어진 대로 버티고 열심히 살아온 덕분이다. 뜨개질은 나의 지난 삶과도 무척 많이 닮아 있다. 요령도 없이, 요행도 없이 그저 묵묵하게 버티고 앉아 부지런히 손을 놀리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무언가 하나씩 완성이 되고, 그것을 발판으로 다른 그 무엇을 또 시작할 힘을 얻는다.

그래서일까. 나는 뜨개질의 정직함이 참 좋다. 뜨개질은 한 시간이든 두 시간이든 공을 들이면 들인 만큼 틀림없이 진척된다. 내가 뜨면 뜨는 대로 꼭 그만큼. 요행도 없고 운을 기대할 것도 없는 것이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

그것이 스웨터든 목도리든 뜨개질을 하고 있노라면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어떤 것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느닷없이 과거의 어느 순간을 불러오기도 하고, 어떤 것은 앞으로의 계획과 꿈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물론 상념으로 흩어져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경우가 더 많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시간이 흐른 만큼, 내가 손을 움직이는 만큼 뜨개질은 그만큼 진도가 나가 있다는 것이다. 살다 보면, 세상에 노력한 만큼 되지 않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운을 바라고 허황한 꿈을 바라는 일은 또 얼마나 많은가. 그런 것들에 비하면 뜨개질은 노력한 만큼의 성과를 반드시 돌려준다. 길을 잘못 들거나 생각을 잘못해서 들인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일이란 뜨개질을 하는 동안에는 어지간해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뜨개질을 하면서 나는 인생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한다. 가로세로 코 수를 계산해서 무늬를 만들어 가다 보면 어쩌면 우리의 인생사도 이런 게 아닐까 싶다. 코 수를 세어서 만드는 건 참으로 복잡하고 이것이 나중에 어떤 모양이 될지, 내가 원하는 대로 모양이 나올지 알 수는 없지만, 시간이 지나 정해진 코 수대로 만들어 가다 보면 어느새 다양한 모양새의 무늬가 완성되어 있곤 한다. 한 뭉텅이의 털실이 내 손을 거쳐 옷이 되고 머플러가 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도대체 내 인생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걸까…? 하루에도 몇 번씩 자문하며 살아가지만, 결국 하루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일 년이 지난 뒤 돌이켜보면 그 하루하루가 나름의 의미가 있는 날이었음을 문득 깨닫게 된다. 뜨개질의 코 수 하나하나가 모여 스웨터가 되고 머플러가 되고 모자가 되듯이 지금 내가 사는 하루하루가 모여 삶이라는 커다란 세월을 만들어 낸다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일도 사람도 모두 시작은 그렇게 한 코에서 비롯된다. 수많은 관계의 시작은 찰나에서 비롯되고, 그것이 우리를 어디로 어떻게 데려갈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뜨개질을 하는 건 아무래도 나보다는 다른 이들을 위한 일이다. 내가 입자고 그렇게 오랫동안 공을 들이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받을 이를 떠올릴 때 얻는 그 흐뭇하고 따듯한 행복감에, 어깨가 아픈 것도 눈이 침침한 것도 이겨낼 수 있다. 그러나 때로는 나만을 위한 뜨개질을 해야 할 때가 있다. 힘든 일이 한바탕 지나가거나 열심히 노력해서 뭔가를 이루었을 때 뜨개질은 나에게 위로이자 선물이기 때문이다.

배우 김성녀가 아닌, 뜨개질 책을 두 권이나 낸 저자답게 나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모든 일과 잠시나마 멀찌감치 떨어져서 나만의 시간, 나만의 공간에서 무대가 주는 즐거움이 아닌 새로운 즐거움을 은밀하게 만끽하고 싶다. 다른 그 누구도 떠올리지 않고 오직 나만을 위해, 내게 최고로 잘 어울리도록 그렇게 멋지게 한올 한올 이 가을을 엮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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