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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4) 57장 갑남을녀 - 17

기사입력 | 2017-08-09 07:39

김유미의 문자가 왔을 때는 이성갑이 유라시아그룹 비서실로 옮긴 지 사흘째 되는 날 점심시간이다. 회사 식당에서 직원들과 점심을 먹고 나오던 이성갑이 핸드폰에 뜬 문자를 봤다.

“생각 많이 했으면 서울로 와. 보고 싶으니까.”

문자를 읽는 이성갑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김유미가 툭 터놓고 말한다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런 성격이다. 그래서 본인은 시원할지 모르지만 가끔 상대방에게 상처를 준다. 다시 문자가 이어서 찍혔다.

“나한테는 기죽을 필요 없잖아? 다 알고 있는 사이니까 돌아와서 같이 있어.”

맞는 말이다. 장단점을 거의 아는 사이다. 그래서 무시당할 때는 더 혹독했다. 이번에는 문자가 좀 길다.

“나도 그동안 좀 생각해 봤는데 우린 평범한 부류야. 그래서 꿈이 클수록 좌절도 컸던 것 같아. 그러니까 서로 상대방에 대한 기대를 절반씩만 접도록 하자. 그럼 잘될 거야.”

식당 앞 복도 끝에 선 이성갑이 한동안 문자를 내려다봤다. 그렇다. 감동적이다. 나흘 전, 부루스타컴퓨터의 AS팀 대리였을 때 이 문자를 봤다면 눈물이 났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졌다. 나는 이제 우연을 믿게 됐다. 우연은 기적과는 다르다. 이 우연은 인연이 꼬리를 이어가다가 만들어진 우연이다. 나는 긴 꼬리를 오랫동안 따라간 후에 이제 잡았다. 다시는 놓지 않으리라. 휴대폰을 든 이성갑이 문자를 눌렀다.

“조언 고맙다. 하지만 네가 말하는 상대방은 내가 아니기를 바란다. 그, 네 회사의 장기만 대리하고 잘됐으면 좋겠다.”

단숨에 문자를 찍어 보낸 이성갑이 어깨를 폈다. 우연히 김유미와 장기만이 만나는 장면을 본 것이다. 김유미는 대범해서 이성갑과 자주 가던 카페를 만나는 장소로 이용했다. 둘을 따라가 보니 둘은 호텔까지 직행했던 것이다. 그것도 내색하지 않고 김유미를 만났던 이성갑이다. 김유미가 자는 사이에 핸드폰에서 장기만과 찍은 사진과 전화번호를 따내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그날 오후, 퇴근 시간이 돼 갈 무렵에 이성갑은 윤정혜의 전화를 받았다.

“자기야, 밥 먹었어?”

윤정혜의 목소리가 밝다. 이성갑이 유라시아그룹 비서실로 특채됐다는 소식은 아직 전해지지 않은 것 같다. 오복수가 정신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유라시아그룹 총무부 담당과장은 비서실로부터 부루스타컴퓨터에 계열사 대우를 해주라는 지시를 받더니 이제는 오복수를 할아버지 모시듯이 했기 때문이다. 오복수는 이성갑을 내준 대가로 그룹으로부터 평소의 10배가 넘는 오더를 받는 중이었다.

“응, 그래. 방금 식당에서 나오는 길이야.”

“어느 식당? 콩나물국밥집?”

윤정혜는 이곳 그룹식당이 호텔 뷔페 수준인 것을 모른다. 들어와 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아냐. 뷔페 먹었어. 그런데…….”

휴대전화를 고쳐 쥔 이성갑의 눈앞에 그날 밤 일이 떠올랐다. 금방 머릿속이 뜨거워졌고 윤정혜의 외침도 귀에 생생했다.

“여보, 현수 씨! ”

다음 날 현수라는 이름을 찾는 건 이성갑에게 쉬운 일이었다. 윤정혜가 다니는 동우컴퓨터 회사의 영업부 과장 이름이 정현수였던 것이다. 정현수는 25세, 기혼남으로 한시티에서 아내와 다섯 살짜리 아들과 셋이 살고 있다. 심호흡을 한 이성갑이 김유미와는 달리 이번에는 말했다.

“그, 정현수 과장한테 안부 전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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