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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6) 57장 갑남을녀 - 9

기사입력 | 2017-07-28 10:53

이성갑에게 ‘꿈’이 있다면 ‘안정된 직장’이었다. 그 이상은 생각해볼 여유도 없었던 것이다. 물론 어렸을 때는 많은 꿈을 꾸었다. 수시로 꿈이 바뀌긴 해도 그때마다 행복했다. 그러나 차츰 현실에 부딪히면서 이성갑은 결국 ‘안정된 직장’이 최우선 목표가 됐던 것이다. 이것은 이성갑뿐만이 아니다. 주변의 대부분, 즉 갑남을녀(甲男乙女)가 겪는 현실이다. 이제 이성갑은 한랜드에서 꿈을 이루었다. 부루스타 컴퓨터에 입사한 지 20일째 되는 날, 이성갑은 월급을 탔다. 아직 한 달이 되지 않았지만 사장 오복수는 월급 5000달러를 지급했다. 거금이다.

“너, 사귀는 여자 없다고 했지?”

월급날 저녁, 오복수가 우리식당에서 같이 저녁을 먹으면서 물었다. 이성갑이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오복수가 말을 이었다.

“여자 하나 오라고 했다. 너하고 비슷한 여자야. 내가 거래하는 컴퓨터회사 영업부 대리다.”

손목시계를 본 오복수가 얼굴을 펴고 웃었다.

“곧 올 거다. 걔도 작년에 한국에서 왔는데 여기 와서 직장 잡았어. 적극적이고 밝은 성격이야. 그리고 예쁘다.”

“그렇다면 저한테는 과분한데요?”

“인연이 있으면 사귀게 되는 거다. 너한테는 자신감이 필요해.”

“감사합니다.”

“인마, 직장 주고 여자까지 소개해주는 사장이 어디 있냐? 끝까지 충성해.”

“충성.”

이성갑이 입으로만 충성을 외쳤을 때 식당 안으로 여자 하나가 들어섰다. 방한복을 입었지만 옷맵시가 났고 훤칠한 키에 얼굴 윤곽이 뚜렷한 미인이다. 숨을 들이마신 이성갑이 금방 기가 죽었을 때 오복수가 떠들썩한 목소리로 맞았다.

“어서 와, 윤 대리. 여기, 내가 말했던 이 대리야.”

“아유, 반갑습니다.”

여자가 웃음 띤 얼굴로 먼저 손을 내밀었다.

“윤정혜라고 해요. 사장님한테서 말씀 많이 들었어요.”

“이성갑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얼굴이 붉어진 이성갑이 윤정혜의 손을 잡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이다. 종업원에게 음식을 시키고 윤정혜의 앞에 소주까지 한 잔 따라준 오복수가 둘을 번갈아 보았다.

“아마 한랜드에 자네들 비슷한 남녀가 수십만 명은 와 있을 거야. 하지만 제각기 다른 사연을 갖고 있겠지.”

어깨를 부풀렸다가 내린 오복수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다 특별해.”

“사장님이 특별하셔서 그런 겁니다.”

의외로 이성갑이 바로 오복수의 말을 받았다.

“유유상종인가요? 제가 사장님의 눈에 띈 것도 그런 맥락인 것 같습니다.”

“이야, 이 대리가 여자 앞이라 그런지 그럴듯한 말을 하는구나.”

만족한 오복수가 활짝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계산하고 갈 테니까 둘이 놀다가. 둘이 잘 어울린다.”

오복수가 식당을 나갔을 때 윤정혜가 웃음 띤 얼굴로 이성갑을 보았다.

“거기 스물일곱이죠? 나하고 동갑이라고 들었어요.”

“아, 그래요? 친구 해도 되겠네.”

이성갑의 얼굴에도 웃음이 떠올랐다. 나이가 같다니 왠지 부담이 덜해지는 느낌이 든 것이다. 그리고 말도 술술 나온다. 오복수가 말했던 자신감이 붙은 것 같다. 그렇지 이젠 기가 죽었다가 풀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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