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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詩가 태어난 초가지붕 위로 ‘봄을 여읜 설움’이 내려앉다

기사입력 | 2017-05-19 14:41

전남 강진군 강진읍 탑동 동산 중턱에 자리 잡은 김영랑 생가. 김영랑은 약 40년 동안 고향인 강진에서 살았다. 그의 고향 집은 삶의 터전인 동시에 시인의 작품세계의 산실이라고 할 수 있다. 전남 강진군 강진읍 탑동 동산 중턱에 자리 잡은 김영랑 생가. 김영랑은 약 40년 동안 고향인 강진에서 살았다. 그의 고향 집은 삶의 터전인 동시에 시인의 작품세계의 산실이라고 할 수 있다.


- (79) ‘모란이 피기까지는’ 김영랑 시인의 고향 전남 강진

모란이 피기까지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5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1934년 4월, ‘문학’ 2호)


산과 들, 바다와 섬을 고루 가진 강진, 그 고즈넉한 자연의 매력과 남도의 넉넉한 인심을 일단 맛보고 나면 늘 이곳을 그리워하게 된다. 또한 강진에는 다산 정약용과 영랑 김윤식의 자취와 흔적을 찾는 방문객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과연 누구의 그 말처럼, 강진은 ‘남도답사 1번지’라고 불릴 만하다.

김영랑의 문학 세계에 있어서 고향 강진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시인의 생애에서 서울과 일본에서 보낸 유학 시절과 말년의 2년 정도의 서울 생활, 즉 대략 7년 정도의 시간을 제외하면, 40년 가까운 세월을 시인은 고향을 떠나지 않았고 생가에서 살았다. 이 고향 집은 그의 시집에 수록된 대부분의 시가 쓰인 산실(産室)이며, 강진은 곧 김영랑의 문학적 공간이다. 그러니 김영랑을 강진의 시인, 남도의 ‘향토 시인’이라 말해도 전혀 틀림이 없다.

‘영랑생가’는 강진군청에서 멀지 않은 읍내 탑동, 나지막한 동산 중턱에 널찍이 자리 잡고 있다. 1948년 김영랑이 서울로 이사한 후 남의 소유가 됐던 것을 1985년 강진군에서 매입해 복원해 놓았다.(국가지정 중요민속문화재 제252호) 실제로 없어진 문간채는 유족들의 고증을 얻어 옛 모습 그대로 복원한 공간이지만, 안채와 사랑채는 몇 군데 수리한 것에 불과해 비교적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다른 지역의 억지로 복원한 작가들의 생가, 차라리 ‘모형’에 가까워서 도무지 정이 안 가는 생가들과는 그 운치부터가 다르고, 당장 이곳에서 생활해도 될 성싶다.

생가 곳곳에 김영랑의 대표적인 작품이 새겨진 시비들이 세워져 있고, 시의 소재가 됐던 우물, 장독대, 작은 인조 연못 등도 예전처럼 복원됐다. “마당 앞/ 맑은 새암을 들여다본다// 저 깊은 땅 밑에/ 사로잡힌 넋 있어/ 언제나 머-ㄴ 하늘만/ 내어다보고 계심 같아// 별이 총총한/ 맑은 새암을 들여다본다”, 시인이 “내 영혼의 얼굴”이라고 노래했던 바로 그 우물이다.


널찍한 마당 주위로 미처 이름 모를 희귀 나무들도 적지 않지만, “심은 지 17, 18년인데” 겨우 “열매라야 은행 세 알”이었다던 은행나무도 이제는 시인이 원했던 대로 그 둘레가 한 아름이 넘게 자랐고(수필 ‘감나무에 단풍 드는 전남의 9월’), 가을이면 떨어진 은행잎에 발목이 잠길 정도라고 한다. 생전에 시인이 특별히 아꼈다던, 안채 뒤편에 있는 다섯 그루 동백나무들의 잎은 여전히 봄 햇살에 빛난다(‘동백닙에 빗나는 마음’). 무엇보다 반가운 것은 장독대 옆 감나무이다. “‘오-매 단풍 들것네’/ 장광에 골붉은 감잎 날아와/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 들것네’// 추석이 내일모레 기둘리리/ 바람이 잦이어서 걱정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매 단풍 들것네’”

안채 안방에 커다란 시인의 초상화가 놓여 있지만, 실제로 김영랑이 글을 쓰던 공간은 사랑채였다. 말년에 서울로 이사한 후에는 발표한 시가 거의 없는 만큼, 그의 시는 대부분은 이곳에서 탄생했다. “사개 틀린 고풍(古風)의 툇마루에 없는 듯이 앉아” 옆에 놓인 시비를 바라보며, 참으로 읊기에 좋은 그의 시를 소리 내어 읽으니 뒷담 넘어 대밭의 댓잎 바람 소리가 이내 불어와 뒤섞인다. 역시나 김영랑의 시는 노래에 더 가깝다.

사랑채 앞 작은 정원에는 방문객을 위함인지 유난스럽게도 많이 모란을 심어놓았다. 애초 계절이 한참 지나버린 선홍빛 동백꽃은 아예 언감생심이었다지만, 모란의 짧은 개화 시기를 놓쳐 이번에도 그 꽃을 볼 수 없어 못내 아쉬워하며, 모란꽃이 지고 나면 바로 이어 피어난다는, 한참 색색의 꽃망울이 벌어진, 애먼 작약꽃들만 연신 사진기에 담아본다. 마침 지나가던 노부부가 눈인사를 건네며 사진을 좀 찍어달라 청한다. 모란과 작약의 꽃이 서로 비슷하지 않냐고 짐짓 물어보니, 어디 감히 나무와 풀을 비교하냐고 힐책하며, 모란과 작약의 구분법을 장황히 늘어놓으신다.

하지만 이제 강진에서는 “5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필요도 없고, 다시 모란이 필 때까지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울지 않아도 된다. 그저 영랑생가 뒤쪽 자그마한 언덕에 새로 조성된 ‘세계모란공원’을 찾아가면 그만이다. 특히 유리 온실(‘사계절 모란원’) 안에는 사계절 내내 활짝 핀 갖가지 색의 모란꽃을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세계 각국의 갖가지 모란을 함께 볼 수 있는 것은 물론 풍성한 덤이다. 다만 최신 재배 기술 덕분에 과분한 눈 사치와 기쁨은 얻었지만, 그 대가로 다시 모란이 피는 닷새 동안의 가슴 벅찬 환희와 “찬란한 슬픔의 봄을” 영영 잃어버려야만 한다.

강진 사람들은 무척이나 욕심이 많은 듯하다. 2012년 봄에 영랑생가의 오른편에 ‘시문학파(詩文學派)기념관’을 개관했다. 이곳은 특정 작가가 아닌 한 시대의 문학 유파를 조망하는 문학 공간이다. 시문학파란 1930년 3월 5일 한국 현대 시문학사에 가장 획기적인 순수시 동인지 ‘시문학’을 중심으로 뭉친 일군의 시인들을 말한다. 시문학파의 중심에는 김영랑과 용아(龍兒) 박용철(朴龍喆)이 있으며, 정지용과 위당 정인보, 연포 이하윤도 참여해 창간호를 발간했다. 그 뒤에 두 번째 호에는 수주 변영로와 김현구, 끝으로 세 번째 호에는 신석정과 허보(許保)까지 합세해 총 9명으로 구성된 ‘시문학파’가 결성됐다. 이들의 순수시 운동은 1930년대 당시에 풍미했던 카프 계열의 프로문학과 감상적 낭만주의 그리고 감각적 모더니즘 사조들에서 벗어나 한국현대문학에 본격적인 순수문학의 뿌리를 내리게 한 모태가 됐으며, 무엇보다 시를 언어예술로 자각한 참된 현대시의 시발점이 됐다고 볼 수 있다. 즉, 시의 언어가 산문이나 일상적인 언어와 다르다는 사실을 먼저 자각하고, 언어의 음악성을 중요시해 아름다운 시어(詩語)를 갈고 닦아 표현하기에 힘썼다.

전시실의 규모는 비록 작지만, 무척이나 깔끔한 기념관이다. 시문학파 시인들의 육필과 유품, 저서들이 잘 정리돼 있다. 또한, 게시물들의 설명도 간결하지만, 그 내용이 깊다. 해방 전 간행됐던 여러 문예지의 창간호와 희귀도서 등을 포함해 소장한 문학 관련 서적들이 충실하다. 무엇보다 연중 이어지는 프로그램들이 꽤 야무지고 알차다.

오래 시간 잊혔던 강진 출신의 또 다른 시인, 김현구도 이제는 고향에서 작은 길 이름 하나를 최근에 얻었다(‘현구길’). 반면 시문학파 동인이면서도 그 시 작품의 결이 다른 시인들과 유독 달랐던, 허보 시인의 경우는 아직도 그 생몰연대마저 미상이며(대략 1907년생으로 추정), 심지어 그 이름조차 본명인지 필명인지 여전히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그의 참으로 독창적인 40여 편의 작품만이 전해질 뿐이다. 그 흔한 흑백 사진 한 장 남겨 놓지 않아, 그를 소개하는 게시판의 공백은 유독 커다랗다. 조만간 기적처럼 시인에 관한 자료가 발견되기만을 빌어본다.

시문학파기념관 입구에는 시문학파 3인의 동상이 있다. 김영랑의 휘문의숙 후배인 정지용은 누구보다 먼저 시문학 준비 과정에서부터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그의 시 작품에 유독 드러나는 뛰어난 ‘회화성’은 김영랑의 시적 ‘음악성’과 만나 뚜렷한 대조를 이루면서도 늘 조화롭게 섞여 들었다.

시문학 초창기부터 편집과 재정을 도맡았던 박용철의 역할은 가히 절대적이라 할 만하다. 특히 시문학 잡지에 수록된 외국시 번역에서 차지하는 그의 비중은 매우 컸다. 일본 유학 시절에 만나 평생을 두고 시심을 나눈 김영랑과 박용철의 우정은 한국 현대시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사건이 되는 시문학파 탄생의 결정적인 효시였다고 말할 수 있다.

광주광역시의 꽤 유서 깊은 광주공원에는 ‘영랑과 용아’, 이 시인들의 우정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두 개의 시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남구 구동). 1970년에 일찌감치 세운 이 쌍시비(雙詩碑)는 다른 곳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형태의 시비이다. 양옆의 비양(碑陽)에는 각기 “나두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나두야 가련다// 용아”(‘떠나가는 배’)와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첫 구절을 고운 글씨체로 새겨 놓았다. 간략하게 설립 내력을 적은 듯한, 시비 뒷면의 글씨는 이제는 세월에 희미해져 알아보기조차 힘들다. 중앙의 작은 화단에는 요즈음 붉은 철쭉이 활짝 피어나, 마치 붉은 꽃다발이 놓여 있는 듯하다. 언덕 중턱쯤에 세워진 이 시비는 근사한 나무 계단이 아래까지 길게 이어져 있어, 멀리에서도 찾기가 어렵지 않다.

1948년 가을 김영랑이 대대로 살아온 고향 집을 정리하고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사했던 이유는 강진이 싫어서가 아니며, 물론 문학적인 이유가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해방된 조국에서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좌우의 이념적 대립과 갈등, 그리고 이어진 6·25 전쟁. 시인 자신도 이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만 허무하게 사라져 갔다.

서울에 남아있는 김영랑의 흔적을 찾는 일은 절대 쉽지 않다. ‘영랑시집’ 초판의 복간본을 보다가, 뒤표지에 적힌 ‘시문학사’의 주소, ‘경성부 적선동(京城府積善洞) 169번지’를 발견하고는 문득 찾아가 보았다. 이 주소는 현재는 지번조차 존재하지 않지만, 대략의 위치는 세종대로 정부서울청사 뒤편의 공영주차장으로 추정된다. 내친김에 김영랑의 ‘양옥 단층집(신당동 290-74번지)’도 찾아보았지만, 이미 오래전에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 있다. 두 곳 모두 그 흔한 안내 표지판조차 찾아볼 수 없어 아쉬움이 크다. 역시나 시문학파기념관이 강진에 있는 것은 당연하다.

시인의 묘소에 관해서도 한마디 해야겠다. 김영랑의 묘소를 그의 고향 강진으로 이장하려는 시도는 이미 여러 번 있었다. 시인의 허망하고 안타까운 최후를 생각하면 당연하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강진 사람들의 김영랑에 대한 애정도 무척이나 각별한 데다 적당한 공간도 여러 군데 있었고, 시인의 유족과도 이미 합의가 됐다는 소식 또한 들은 지 오래지만, 이런저런 이유에서 아직도 성사되지 못했다. 애초 전쟁 중에 장충단 공원 근처 남산 기슭에 임시로 매장됐다가, 망우리 묘지를 거쳐 현재의 자리(경기 용인시 천주교 공원묘원)에 위치하기까지도 이미 두 번의 이장 절차를 거쳤으나, 시인이 그토록 사랑하던 고향 강진으로는 아직 돌아오지 못했다. 물론 김영랑의 넋이야 벌써 오래전에 귀향했으리라 믿으며 다시금 그 아쉬움을 애써 달래본다. 글·사진=

박광수 불문학자·번역가

영랑생가 인근의 시문학파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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