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소설가 신승철이 본 서울 서부이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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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이란 육신이 태어난 물리적 장소가 아니라 영혼이 안주할 수 있는 장소’라고 한 소설가 강석경의 말은 내게 여전히 유효하다. 충북 청주에서 태어났지만 내 영혼이 안주할 수 있는 장소는 서울 서부이촌동이다. 그렇다. 유년의 삽화와 회색 동화가 그려졌던 곳, 서울 서부이촌동은 진정한 의미의 내 고향이다.

1968년 겨울의 어느 날 밤. 용산역에는 함박눈이 펑펑 내렸다. 내 기억이 아니라 지난해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말씀이 그랬다. 최근 모든 기억을 돌아가신 어머니에 기대어 떠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이번 고향기행은 어머니를 떠올리며 움직일 수밖에 없다.

상경한 어머니는 그날 용산역 개찰구를 빠져나와 우측으로 꺾어서 지금의 철도회관이 있는 길을 따라 걸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등에는 내가 업혀 있었고, 양손에는 화물로 올려보내고 남은 연탄집게와 살림 등속을 잔뜩 들고 있었으며, 두 살 터울의 형도 무거운 짐을 들고 옆에서 씩씩하게 걸었다고 한다.

지금은 경의·중앙선이 지나는 기차 건널목에도 그날 눈이 펑펑 내렸을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키 작은 집들이 모여 있어서 정겹다. 나중에 형과 나는 그 길을 땡땡이골목이라고 불렀다. 그 땡땡이골목길의 끝에 서부이촌동이 자리하고 있었다.

지도를 보면 서부이촌동은 날씬한 물고기 모양을 하고 있다. 한강대교 북단에서 강변북로나 이촌로를 따라 서쪽으로 한강철교를 지나 원효대교 북단까지 길게 늘어선 공간이 서부이촌동이다. 그러니까 한강대교에서 한강철교까지의 터에는 이촌현대한강아파트와 강변맨숀 등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 공간이 물고기의 머리 부분에 해당하고, 물고기의 아가미 부근에는 한강철교가 가로지른다.

어머니는 땡땡이골목 끝자락에서 다시 우측으로 방향을 틀어 이촌고가교를 넘어야 했다. 아버지는 미리 상경하여 큰아버지 댁인 서부이촌동 시영아파트에 머물고 있었다. 계단을 타고 올라 이촌고가교의 정상에 이르면 서부이촌동을 갈라놓은 한강철로가 남북으로 뻗어있다. 용산역도 보이고 지금은 서울우편집중국과 용산화물터미널 외에 물류센터도 볼 수 있다.

역 근처에 보금자리를 잡은 사람들은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보헤미안의 족속들인지도 모른다. 내 어린 기억에도 서부이촌동에는 판잣집도 많았고, 그 인근에서는 화재가 끊이지 않았다. 이촌로를 따라 서쪽으로 향하면 오른쪽에는 용산역과 철도기지가 있었기에 담이 높았고, 담 위에도 가시철망이 쳐져 있었다.

이미지 크게보기 내 유년시절에는 새남터 기념성당 자리에 유치원이 있었다. 지금은 박태연 명지대 건축학과 교수가 설계한 고풍스러운 성당이 들어서 있다.

이촌고가교를 내려서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고층 아파트들을 배경으로 한국식의 뾰족한 종탑이 있는 3층 기와건물이다. 천주교 순교성지 새남터 기념성당이다. 새남터는 ‘새나무터’의 준말이다. 억새와 나무가 많았던 곳이고, 이곳에서 천주교 성직자 11명과 평신도 3명이 순교했다. 대표적인 순교자는 중국교회로부터 조선에 파견되었던 중국인 주문모 신부,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인 앵베르 범 라우렌시오 주교, 현석문 가롤로 성인 등이다.

그뿐만 아니라 세조 2년에는 단종 복위를 꾀하던 성삼문 등 사육신이 이곳 새남터에서 처형되었다. 조선 초기 새남터는 군사 훈련장이었고, 국사범(國事犯) 등 대역 죄인들을 처형하던 곳이었던 것이다. 망나니들의 칼춤과 북소리, 그리고 피가 난무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내 유년의 기억 속 새남터 기념성당은 그저 새남터유치원일 뿐이었다. 담장이 높았고, 잔디가 깔린 마당도 넓었으며, 당시로는 드물었던 놀이터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었다. 어머니의 권유로 새남터유치원과 이웃한 대한예수교 장로회 소속의 이촌동교회에 다녔던 나는 어느 날 한 전도사를 따라 아이들과 새남터유치원에 놀러 갔다. 장난이 심했던 나는 전도사로부터 가볍게 야단을 맞았다. 그러나 교회에 가지 않는 이유를 묻는 어머니에게 나는 전도사에게 뺨을 맞았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 후로 교회에 가지 않아도 되었지만 왠지 부끄러움이 남아 있는 곳이었다. 이제 담장은 사라졌고, 건축학적으로도 아름답고 고풍스러운 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박태연 명지대 건축학과 교수가 설계했다고 들었다.

이촌로를 벗어나 성당 뒤편으로 돌아가자 한쪽 벽에 그림이 그려져 있는 신아맨션이 나왔다. 내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나의 첫 연애편지가 연달아 3통이 도착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나는 이 집을 방문하여 한 아주머니에게 따님과 교제하고 싶다고 졸랐다.

어쩌다 그런 객기를 부렸는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아주머니에게 대학 가서 만나라는 말만 듣고 물러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때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고, 닥치는 대로 책을 읽고 글을 쓰던 시절이었다.

이촌로2가길을 따라 서쪽 방향으로 걷다가 보니 왼쪽은 20층이 넘는 이촌동대림아파트가 강변을 따라 병풍처럼 서 있고, 오른쪽은 오래된 맨션이나 구식 건물들이 들어차 있다. 현대와 근현대사가 공존하는 곳이 바로 서부이촌동인 셈이다. 걷다가 우뚝 멈춘 곳은 이촌종합상가 앞에서였다. 예전에는 그냥 이촌시장이었다. 건물 오른쪽으로 상가들이 붙어 있어서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이던 곳이었다.

나는 떡집이 그대로 있나 궁금해서 상가 안으로 들어섰다. 예전에는 뻥 뚫린 공간이었는데, 온통 칸막이가 쳐져 시야를 가렸다. 어머니는 아홉 살 어린 남동생을 안고 나타났었다. 나는 동생을 낳아준 어머니와 핏덩어리 동생을 위해 이촌시장으로 달려가서 숨겨둔 용돈으로 송편을 사다가 건넸다. 어머니는 군침을 흘리던 내게 송편을 모두 돌려주었다. 그때 어머니의 나이는 서른일곱이었다.

이촌상가를 나와 맞닥뜨린 곳은 대림아파트 105동이었다. 그곳이 우리 가족이 살았던 시영아파트 터였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곳에는 숙명여대 교수이자 테너였던 엄정행 씨도 살았었다. 기능직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고, 술도 마시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촌동교회에 다니는 집사였고, 당신께서 교회 교사들과 청주중앙교회 앞에서 찍은 사진을 본 적도 있으며, 훗날 아버지는 장로가 되었다.

아버지가 상경한 이후로 처음에는 지금의 서부교회 터에 있었던 물탱크집에 살다가 성실하게 일하여 마련한 집이 시영아파트 반지하였다. 다른 식구들의 생각은 모르겠는데 반지하에서 살았다고 해서 나는 한 번도 부끄러워한 적이 없었다. 머리맡에 두었던 물대접이 얼어붙을 정도로 추웠던 물탱크집에 비하면 방이 3개나 있었던 반지하 시영아파트가 따뜻하고 궁처럼 신났던 것이다.

이촌로2가길의 끝은 중산아파트다. 위장크림을 바른 군인의 얼굴처럼 얼룩진 아파트의 외관이 안쓰러웠다. 내 기억으로는 그 아파트가 건립된 지 40년도 넘은 것으로 안다. 재건축이나 보상 문제로 의견 충돌이 있는 모양새였다. 물고기의 꼬리 부분에 해당하는 이촌119 안전센터를 지나 이번에는 이촌로를 따라 동쪽으로 걷다 보니 시범아파트 앞 상가 2층에 국기태권도체육관이 그대로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나는 어려운 형편 중에도 어머니 덕분에 형제 가운데 유일하게 그 태권도장에 다녔다.

걷다가 멈춘 곳은 새남터 기념성당과 이웃하고 있는 이촌동교회다. 70주년을 맞는 교회고, 가수 조영남 씨와 그의 동생이자 부산대 음악학과 교수인 조영수 씨가 젊은 날 이 교회의 성가대장을 맡았었다고 들었다. 어머니의 말에 따르면 가난에 지쳐 마음에 위로라도 얻고자 찾아간 곳이 그 교회였다고 했다. 그곳에서 어머니는 어떤 위로와 축복을 얻어냈을까.

서쪽으로 뻗은 이촌로를 돌아보았다. 어느 비 오는 날, 어머니는 고스란히 비를 맞고, 나는 어머니의 외투 속에 숨어 함께 걷던 장면이 떠올랐다. 고향에 오면 누구나 어머니가 그리운 법이다. ‘고향이란 육신이 태어난 물리적 장소가 아니라 영혼이 안주할 수 있는 장소’라고 한 소설가 강석경의 말은 내게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서부이촌동에도 곧 봄은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