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이명학 한국고전번역원장은 “고전을 많이 읽을수록 삶의 질이 높아진다”며 번역원을 부모가 아이와 함께 고전을 읽을 수 있는 곳으로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곽성호 기자 tray92@

한문고전 수집·정리·번역 이명학 한국고전번역원장

이명학(60) 한국고전번역원장(성균관대 한문교육과 교수)을 만나러 갈 때만 해도 한문과 고전 이야기에 집중할 생각이었다. 대학에선 재미있는 수업으로 이름난 ‘명교수’이고, 지난해부터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같은 국가기록과 개인 문집을 수집·정리·번역하는 한국고전번역원장직을 맡고 있으니, 한문과 고전 그 깊고 넓은 세계와 함께하는 ‘히스 스토리(His Story)’를 들어보고 싶었다. 영화 ‘광해’ ‘명량’, 드라마 ‘정도전’ 등 역사 드라마가 인기를 끌면서 역사 속에서 현대적 리더십을 찾으려는 열망이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우니 고전을 이야기하기에 적절한 시간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주변에서 ‘미담을 주렁주렁 달고 다닌다’는 이 원장의 ‘미담들’은 언론을 통해 간간이 알려졌기에 그의 ‘역사’에서 새로운 부분을 캐보겠다는 작은 야심을 품었으나 결국 야심은 실패에 그쳤다.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 인터뷰는 거슬러 가려 해도 어찌나 끌어당기는 힘이 강한지 번번이 이 원장의 나눔, 기부, 소통, 좋은 멘토 같은 이야기로 몰려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원장의 ‘히스 스토리’는 ‘한국고전번역원’을 닮아보기로 했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같은 공식 국가 기록과 개인 문집 수집·번역이라는 번역원의 투 트랙처럼 한문 교육과 고전번역이라는 그의 공식 업무와 개인 미담이라는 투 트랙을 따르기로 했다. 이 원장을 지난 4일 서울 종로구 구기동 고전번역원에서 만났다.

이 원장의 이야기는 모든 사람의 근원이 그렇듯 그의 부친에서 시작됐다.

“어려서 아버님이 군인이셨는데, 우리 형제 운동화는 안 사주시고 신문 배달하는 아이의 운동화는 사주셨어요. 그땐 섭섭하다고 했어요. 부모님이 어려운 사람을 그냥 못 지나치셨습니다.”

2011년 세상을 떠난 그의 부친은 평양이 고향으로 열일곱 살에 대학 진학을 위해 혼자 서울에 왔다가 6·25전쟁으로 가족과 생이별을 하게 됐다. 다행히 정부에서 미국 연수를 보내줘 귀국 후 한때 육군 군수학교 재무관리 분야 교수로 재직하다 이후에 작은 사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형편이 좀 좋아진 뒤 주변에서 땅을 사두라고 했을 때 “사정이 있어 내놨을 텐데, 나중에 땅값이 오르면 그 사람이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냐”며 한 평도 사지 않았던 부친이었다. 이런 아버지 뜻에 따라 이 원장은 두 가지 보람있는 일을 하게 된다. “유산을 두 아들이 졸업한 중동고에 기부해 어려운 학생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는 부친의 유언에 따라 자신과 동생 이명식 연세대 의대 교수가 졸업한 중동고에 10억 원을 기부해 고인의 호를 딴 고천(高泉) 장학기금을 마련했다. 그 이듬해엔 부친의 뜻에 따라 사비를 들여 ‘효 애니메이션’을 제작했다.

“아버님이 생전에 효 공원을 만들고 싶어 하셨는데, 공원을 채울 콘텐츠가 없다고 말씀드렸더니, 효 애니메이션을 만들자고 하셨어요. 생전에 만들었어야 했는데 아버님이 돌아가신 뒤에야 착수했습니다. 전국 6900여 초등학교에 무료 배포했고, 소년원, 교도소에도 보냈어요. 한 사람이라도 애니메이션을 보고 깨닫는 것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또 고천 장학금은 매년 4년 장학생 1명, 1년 장학생 여러 명을 선발해 대학 학비를 지원하고 있다. “강남 한가운데에서 어렵게 공부하는 학생들이 많아요. 그런 아이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된다고 생각하니 이 일을 한 것이 너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선친도 좋아하실 겁니다.”

부친의 이 같은 DNA는 이 원장에게 고스란히 전해져 그 역시 2012년 교육과학기술부와 한국교직원공제회가 공동제정한 ‘대한민국 스승 상’ 상금 1000만 원, ‘100대 명 강의’ 상금 300만 원 등 모든 상금을 성균관대 장학금으로 내놨다. 사정이 어려워 등록하지 못한다는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주변 사람들을 동원해 돈을 모아 장학금을 지원한 일도 한두 번이 아니다. 이 원장은 “남을 돕는 일이 대단한 철학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눈을 돌리지 못해서다”고 하지만, 그에게는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따뜻한 마음 수준 이상이 있다. 기발한 기획력과 주변의 인맥과 네트워크를 이용하는 추진력이다. 예를 들어 성균관대 사범대학장 시절, 한국어를 전공하는 중국인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 2008년 중국에서 ‘한글 백일장’을 연 뒤 지금까지 중국에서 7번, 베트남에서 2번, 중앙아시아에서 6번, 동유럽(헝가리)에서 1번의 한글 백일장을 열었다. 주변의 도움을 모아 수상자들을 한국에 초대했고, 인맥을 동원해 이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왔다. 요리를 잘하는 학생의 경우 고등학교 동창이 운영하는 유명 한식 레스토랑 주방에 취직시켜줘 한식을 마스터 하게 하는 식이다.

사범대 학생들을 다문화 가정 아이들과 연결시키는 프로그램도 만들어 다문화 가정 아이들뿐 아니라 한국 남성과 결혼한 외국 여성들이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채널을 마련해 줬고, 탈북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관심이라는 생각에 이들을 교수와 1대 1로 짝지어주기도 했다. 탈북 학생들을 출신 지역별로 정리해 이북5도청에 도움을 청하는 손편지를 쓰기도 했다. 성의를 다한 만큼 대부분 결과도 좋았다고 한다.

“젊은 친구들을 좋아한다. 학생들과 카톡도 하고, 쪽지도 쓰고, 손편지도 보내고…. 소통은 아이들의 관심사에 얼마나 관심을 기울이는가에 달려 있다”는 이 원장은 성균관대 티칭 어워드, 대학 100대 좋은 강의 등에 선정되기도 했다.

“대학 교수쯤 되면 학생들에게 지식을 전달 못 할 교수가 어디 있습니까. 주입식 교육을 받고 인생에 대해 많이 생각하지 않았던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주고, 올바른 길을 이야기해주는 것이 좋은 스승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학교뿐 아니라 학부모들도 변해야 합니다.”

2014년 4월 한국고전번역원장으로 일을 시작한 그는 번역원에서 일하면서 가장 아쉬운 것이 학생들을 보지 못하는 것이라며 출퇴근길 국민대 앞을 지날 때마다 빨리 학교에 돌아갔으면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젊은 친구들과 만나지 못하는 아쉬움은 아쉬움 대로 두고, 이 원장은 번역원에서도 특유의 아이디어, 기획력, 추진력으로 많은 일을 해나가고 있다. 취임 9개월 만에 거둔 가장 의미 있는 결과라면 한국고전번역원의 오랜 숙원 사업인 새 청사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이곳 청사로 옮겨온 지 40년이 됐는데, 여름엔 누수, 겨울엔 추워서 석유 난로를 쓰고 있어요. 석유 난로를 쓰는 공공기관은 아마 우리밖에 없을 겁니다. 외국 단체들이 MOU를 맺으러 올 때마다 좀 부끄러웠어요. 한국은 이런 곳에서 자기 나라 고전을 번역하는구나 하고 얕잡아 볼 것 같아서 말이죠. 이번에 예산 통과가 돼서 은평구 뉴타운으로 이전키로 했어요. 올해 토지를 구입하고 내년에 신축사업을 하게 됩니다.”

청사 이전의 경우 그저 현대적이고, 넓은 공간으로 옮긴다는 것이 아니라 그곳을 지역의 인문학 메카로 만들겠다는 청사진이 더 인상적이었다. “이제까지 공공기관들이 지역 사회와 떨어진 섬처럼 존재했는데 저희는 새 청사로 이전하면 그곳에서 부모와 아이들이 함께 고전을 읽을 수 있을 수 있는 곳으로 만들고 싶어요. 초중고생을 위한 인문학 강의도 주기적으로 열고, 은퇴자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도 진행해 지역의 인문 메카로 만들고 싶습니다. 지역사회에 일정하게 공헌하는 것, 그것이 국가 예산을 받는 공공 기관이 해야 할 일입니다.”

이와 함께 이 원장은 남북 고전 공동 번역, 고전의 대중화 등을 주요 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다고 했다. “남북이 같은 민족임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것이 조상의 문집 같은 것이 아니겠느냐”는 그는 “북한 사회과학원 산하 민족고전연구소에 공동 번역을 제안해 좋다는 답을 받았는데 남북관계가 경색돼 진행이 안 되고 있다. 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면서 “궁극적으로 남북 초중고생들이 같이 읽을 수 있는 민족 문고를 간행하는 것이 최종 목표”라고 말했다.

한편 요즘 대중의 관심이 높은 ‘고전의 대중화’에 대해서도 이 원장은 할 말이 많았다. 번역원에서는 지난 2011년부터, 2026년을 목표로 조선왕조실록 현대화 작업을 벌이고 있다.

“1993년에 번역원에서 26년 걸려 완역했는데, 옛날 한문식 어투여서 요즘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한다. 또 당시에는 관련 자료가 많지 않아 오역도 많았고 주석도 없다. 이번에는 현대어 어감에 맞게 옮기고, 주석도 상세하게 달고, 오역도 바로잡는다”고 그는 설명했다.

또 이 같은 옛 기록의 현대화 작업과 함께 기본적인 역사 자료들을 대중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2차, 3차 문화콘텐츠로 가공하는 작업에도 속도를 올리고 있다. 일반인들이 읽을 수 있도록 주제별로 가려 뽑아 선집을 만들어, 일반인들이 쉽게, 또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번역원에서는 올 상반기 ‘조선왕조실록’의 ‘사신왈’, 즉 사신이 한 말만 가려 뽑아 단행본으로 출간할 계획이다.

이 부분에서 이 원장은 전문 인력 양성 이야기를 꺼냈다. 이 원장은 “유명한 한문 1세대들은 이미 돌아가셨고, 현재 활동 중인 2세대들은 70, 80대에 이르렀다. 이들의 역량과 지식을 빨리 전수받을 3세대를 양성해야 한다”며 이를 위해 고전번역원 교육원의 대학원대학 전환도 이뤄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는 고전 번역도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 역사적 지식, 제도사를 알아야 하는 국가기록 번역과 개인 문집 번역이 다른 ‘투 트랙’이라며 “전문 번역자들 양성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경우 한자로 기록된 우리 기록을 중국이 중국어로 옮기고, 이것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이 생기지 말라는 법도 없다. 조바심이 난다”며 이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심을 요청했다.

최현미 기자 ch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