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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초동으로 이사 온 것은 1990년, 특히 교대역 근처는 내가 25년째 살아오고 있는 고향 같은 곳이다. 1990년 13세 때 우리 가족은 압구정동에서 서초동 교대역에 있는 삼풍아파트로 이사를 왔다. 내가 살던 아파트는 부근 아파트보다 완만한 언덕배기의 좀 높은 위치에 있었고, 맨 꼭대기 층이라 밤에는 멀리 남산타워가 보이는 야경도 볼만했다. 다만 눈 오는 겨울에는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항상 종종걸음으로 걸어야 했고 교대역에서 내가 사는 아파트까지 걸어 올라가려면 거리는 가까웠지만 언덕져서 그런지 어린 나로서는 참 힘들었다.

이전에 살던 곳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예원학교에 입학한 나는 서초동에서 새로운 중학시절을 시작했다. 지금의 정동극장 근처, 이화여고 맞은편의 예원학교를 통학하기 위해 매일 아침 사설 봉고에 몸을 싣고 1시간 정도 달려갔었다. 중학시절 학교에서 집에 오자마자 바로 논현동 영동시장 내에 있는 발레학원으로 갔고, 대부분의 저녁시간과 주말을 발레연습으로 보냈다. 가끔 발레공연을 보기 위해 그 당시 국립발레단이 있었던 남산이나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으로 갔고 가족과는 주로 강남고속터미널 부근이나 집 근처 삼풍백화점을 이용하고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강남역이나 압구정동으로 갔었다.

또래보다 1년 일찍 초등학교를 들어간 나는 1992년 15세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 전까지 서초동에서 2년여 살았던 듯하다. 그 이후 러시아서 유학하던 1996년까지 1년에 두 번, 6월에 한 달 정도, 1월엔 1주일 정도 서초동 집에 머물렀다.

러시아 유학시절 방학 때 한국에 오면 난 항상 예전에 다녔던 발레학원에 가서 몸을 풀었다. 10대 소녀였던 나는 집 근처에서 친구들을 만나 수다를 떨거나 언니와 함께 고속터미널 근처와 1995년 무너진 삼풍백화점에 가는 것, 그리고 좋아하는 함흥냉면을 먹기 위해 우리 집 근처에 있는 냉면집을 가는 것 정도였다

러시아 유학시절 어머니는 항상 6월 초쯤 내가 있던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바가노바 발레아카데미로 오셔서 나와 함께 몇 주를 보내신 뒤 같이 귀국했었다. 1995년 6월 어머니와 내가 러시아에서 한국에 도착하기 바로 전날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는 뉴스를 듣고 어린 나이에 받은 충격을 잊을 수가 없다. 게다가 나의 친언니가 백화점 무너지기 30분 전에 나왔다는 소리를 듣고서 가족, 친구들과의 작은 추억이 있었던 장소가 갑자기 없어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고인이 되었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겁고 슬펐던 기억이 있다.

1996년 러시아 바가노바 발레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그해 겨울 한국에서 국립발레단을 들어갔다. 그리고 국립발레단이 남산 국립극장에서 서초동 예술의전당으로 옮긴 2000년 전까지 서초동에서 남산 국립극장으로 출퇴근했고, 국립발레단이 예술의전당에 자리 잡으면서 나는 서초동에서 거의 모든 것을 해결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을 발레연습과 공연으로 보내야 했고 교대역에 있는 집과 예술의전당을 오가는 게 전부일 뿐 그 일대를 많이 돌아다닌 적은 없었다. 발레단 생활을 하면서 지방공연하느라 서초동을 벗어난 적은 많지만 방향감각이 없는 나로선 대부분의 지역이 생소했다.

2009년 네덜란드에서 귀국 후 지금까지 나는 여전히 서초동에 있는 예술의전당으로 매일 출근한다. 서초동 교대역에서 남부터미널로 해서 예술의전당 가는 길은 언제나 그렇듯 번화하다. 교대역 근처는 낮과 밤의 분위기가 강남역만큼이나 다르다. 주변 서울교육대 학생들과 법원단지의 법조인들, 그리고 주면 직장인들이 밤에는 북적거리며 밤 문화를 주도한다.

여기는 강남역, 청담동처럼 고급스러운 음식점, 화려한 쇼핑거리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저렴하게 즐길 수 있는 고깃집이나 직장인 상대의 맛깔스러운 음식점들이 많이 있다. 교대 정문 앞 거북곱창이라는 곱창집이 정말 유명한데 지금은 좀 더 안쪽으로 이전했고 대로변에는 다른 곱창집들이 즐비해 있다. 30년 전통의 그 식당은 오후 늦게 문을 열어 새벽까지 영업을 하며 저녁에 그 일대를 지나게 되면 곱창 굽는 냄새가 나의 미각을 자극한다.

근처의 남부터미널도 예전보다 더 번화해졌고 오피스텔건물이 많이 들어섰다. 남부터미널 건너편에는 전자상가가 있어서 전자제품을 구입할 때 이용하곤 한다. 남부터미널은 한 번도 이용해본 적은 없지만 강남고속터미널과 비교해 규모는 작아도 시외버스를 이용하는 승객들로 항상 붐빈다.

서초역에서 예술의전당 가는 길은 도로도 넓고 주변에는 자동차전시장들과 많은 빌딩들이 늘어서 있으며 예술의전당 주변에는 분위기 좋고 맛도 좋은 음식점과 상가들이 많다

예술의전당이 자리하고 있는 우면산은 동서 쪽으로 길게 뻗어있는 산으로 지대가 높지 않아 부근의 사람들이 등산로로 이용한다. 내가 매일 출근하고 있는 국립발레단이 있는 건물은 예술의전당 바로 뒤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창문으로 바라보는 우면산 정경은 참 멋지다.

서울시내에 이런 산을 뒤로하고 있는 건물이 얼마나 될까. 대부분의 문화예술 회관은 산이나 녹지를 기반으로 건설이 되지만 예술의전당에서 바로 조금만 나가도 차로 북적거리는 번화가가 펼쳐진다. 서울에 많은 공원과 녹지가 점점 없어지고 건물들이 들어서는 시기에 우면산은 나에겐 숨돌릴 수 있는 안식처가 되기도 한다.

2011년 집중 호우로 인해 우면산 산사태가 일어났다. 아마도 우면산의 지질적 특성과 무분별한 건설 등으로 인한 녹지감소로 인재라 할 수 있는 가슴 아픈 일이었다. 산사태로 인해 출근과 연습이 취소되었고 한동안 예술의전당 일대는 사후처리와 복구로 인해 복잡했었다.

그런데 서초동을 비롯해 강남 일대에 물난리로 건물과 기물들이 파손되고 인명 피해가 있었을 때도 국립발레단 연습동은 신기하게도 별 피해가 없었다. 오페라하우스가 진흙으로 덮이고 대부분의 기물이 손상을 입고 건물 내부에 물이 차서 물을 퍼내는 상황에도 바로 우면산과 인접한 연습동은 큰 문제가 없었기에 우리발레단원들은 “여기가 기가 정말 센 장소인가 보다”라고 이야기했었다.

우면산 아래에 있는 예술의전당은 나의 직장이며 나의 인생이나 마찬가지다. 서초동에서 25년을 살며 내 삶의 대부분을 보냈기 때문에 서울에 오래 살아도 지리에 어두운 나는 서초동을 벗어나면 여전히 낯설다.

지금은 내비게이션 덕분에 서울은 물론 지방 어디든 잘 다니지만 나로선 예술의전당 부근만큼 편한 장소는 없는 듯하다. 누구에게나 고향 같은 장소가 있듯 나에게는 서초동 예술의전당 근처가 고향이며 아마도 예술의전당과 교대역 근처에서 평생을 살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이미지 크게보기 음악회, 뮤지컬부터 각종 전시회까지 각종 문화예술행사가 연중 펼쳐지는 서울 예술의전당. 서초구의 중앙에 위치해, 남쪽으로 과천, 안양으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