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그래픽=송재우 기자 jaewoo@munhwa.com

지난달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 때 나는 한 가지 깨달은 바가 있었다. 명동성당의 지붕에 십자가가 누워있다는 사실이었다. 특별중계에 나선 방송이 항공촬영으로 비춰주지 않았더라면 계속 모르고 지냈을 그 초대형 십자가의 존재는 마치 지구 반대편의 먼 나라 페루 어디엔가 상공 높이에서나 보인다는 미스터리의 거대 형상마저 떠올리게 했다. 눈에 잘 띄게 여기저기 세운 십자가야 크고 작은 교회마다 상점의 간판만큼 허다한 한국 땅이지만, 그와는 다른 무게감의 거대 십자가가 없는 듯 거기 엎드려 있을 줄이야. 숨은 신이라는 말까지 문득 떠올리며 나는 무슨 발견이나 한 듯 자문했다. 큰 십자가는 지상이 아니라 하늘에서 보이는 것인가.

명동성당과 명동은 누구에게나 알려진 곳이다. 안 가본 이도 안다고 여길 정도로 익숙한 곳이다. 그런데 잘 안다고는 누구도 말하기 힘든 곳이기도 하다. 마치 여행객이 그 나라를 잘 안다고 하기 힘든 것처럼, 명동성당 옆을 자주 지나다녀도 지붕 위의 십자가를 알기 힘든 것처럼. 여기 명동 중심의 가장 큰 빌딩에서 30년째 직장 생활을 하는 내 동창생은 재직기간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시간을 이 동네에서 소비하고도 명동을 잘 모르겠다고 한다. 사람이 많이 거주하지 않는 동네여서일까.

주민등록상 인구가 3000여 명이고 하루 평균 유동인구가 150만 명에 이른다는 이 특이한 동네에 사람들은 아침부터 심야까지 쉴새없이 오가며 머물고 떠나기를 반복한다.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오고간다. 누가 세어보았는지 모르지만 국내인과 외국인의 비율이 거의 비슷하다는 말도 있다. 그럼에도 아시아인이 대부분이어서 이국적인 분위기는 덜 풍기는 편이다.

뭐니뭐니 해도 명동은 상점들의 거리다. 그리고 행인들의 주된 벗은 상품이다. 예나 지금이나 이어져온 명동의 이 같은 이미지는 이 동네에 첫발을 딛는 순간 확인된다. 백화점으로 즐비한 남대문로 대로를 건너 명동의 중앙길로 진입하면 개별 품목의 크고작은 상가들이 줄을 잇는다. 무슨무슨 ‘주얼리’ 혹은 ‘액세서리’라 써붙인 장신구점, 비누 세제 화장품점, 그리고 커피점 하나 건너 여성속옷이 진열된 가게, 그리고 다시 화장품점…. 행인 중 젊은 여성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을 만하다. 한 블록 전체가 하나의 상품전시장을 이루는 풍경이다. 쇼핑과 엔터테인먼트를 동시에 해결하는 원스톱 쇼핑센터라 표방하는 할인매장에서부터 영화관, 그리고 종합의류매장이 이어진다.

그렇게 사열하듯 유네스코회관까지 약 100미터를 따라 한 블록을 지난다. 그러고 보니 초입에 있었던, 내 나이보다 한참 더 오래된 만둣집은 다른 업소들의 부침에도 꿋꿋이 버텨오던 그 긴 역사를 뒤로 하고 어느새 사라지고 없다. 2년 만의 방문이니 그 사이에 일어난 일인 모양이다. 그 밖에도 눈에 익었던 많은 집들이 상호를 바꿔달았다. 또다시 이어지는 화장품과 신발 같은 고만고만한 상품들의 거리를 한 블록 더 걸으면 명동예술극장 앞 네거리에 이른다. 명동의 중심이라 할 거기에 포진한 각 은행들에서 사람들은 돈을 찾고 또 바꾼다. 중국어로 된 큼지막한 안내문이 은행마다 내걸렸다. 일본어는 상대적으로 조그맣게 쓰여있다. 오랜 세월 이곳의 대세로 군림했던 일본어가 퇴조하고 중국어가 약진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지나오는 200미터 내내 상점 앞에서 손님을 부르는 점원들은 이제 일본어 대신 중국어를 쓰고 있었다. 우리은행은 상호를 ‘友利’라 쓰고 그 밑에 일본어 발음기호로 작게 표기했다. 명동의 주도권은 이제 중국인에게로 넘어간 것인가. 명동의 새 랜드마크로 치솟은 중국대사관의 위세처럼 차이나타운이 형성되는 것이기라도 할까. 명동입구의 대형 아치는 중국인이 좋아하는 붉은색 바탕에 중국어로 환영문구를 내걸고 있다. 중국어가 명동을 지배하고 있다.

그렇게 동서로 진행하는 중앙가로를 따라 좌우에 남북으로 이어지는 서너 개의 길가에도 역시 대동소이한 풍경이 펼쳐진다. 상점의 간판은 영어가 주종이고 한글은 보조이며, 오가는 말과 안내문은 중국어가 주종이고 일어가 보조로 되어 있다. 서양인은 별로 없다. 마치 19세기말 조선의 패권을 놓고 다투던 중국과 일본의 정치적 쟁투가 이 동네에서 경제적으로 압축 재연되었던 때를 연상시킨다.

명동의 일상은 구경하고 사고 먹는 행위로 주로 구성된다. 사람들은 대개 구경·쇼핑·만남을 위해서 명동을 찾는다. 그 밖에 딱히 할 것을 달리 찾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상품의 매개없이 뚜렷이 명동을 대변할 만한 것은 없어보인다.

명동은 오래된 동네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면 오래된 그 무엇도 제대로 남아있지 않은 동네다. 얼마나 오래된 것을 기준으로 하느냐에 달린 것이겠지만 100년 이상된 것은 명동성당 말고 눈에 띄는 것이 거의 없다. 명동은 국제적인 것의 원조격이라 할 만하고, 지금 우리가 누리는 현대식 의식주의 생활방식이 출현한 발상지라고도 할 수 있다. 그 명동의 기틀을 이룬 것이나 다름없는 일제강점기 명치정(明治町) 시절의 자취를 간직하는 건축물은 명동예술극장과 을지로입구 쪽 한국전력 정도밖에 남아있지 않다. 남산 자락을 타고 내리는 능선을 따라 기와집이 즐비했던 조선조의 자취는 더구나 느낄 수 없다. 교황이 시복식을 행한 명례방(明禮坊) 공동체의 초창기 천주교도들이 목숨을 걸고 집회하던 김범우의 집이 거기 있었다는 설명만 전해질 뿐.

한성은 경성으로 개명됐다가 다시 서울로 되었고, 명례방은 명치정이 되었다가 다시 명동이 되었다. 잃어버린 한성이란 지명은 이제 중국대사관 주변의 화교 시설이나 중국인 상점 같은 곳에 어쩌다 이국적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나라가 일본으로 넘어가기 전, 풍운의 시기에 이곳 중국공사관을 중심으로 주변의 상권을 장악하고 위세를 떨쳤던 중국인들이 여기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를 지금 이곳을 관광하는 중국인들은 대강 안다. 명동성당은 프랑스 신부가 설계 감독했지만 중국인들이 구워낸 벽돌로 중국인 기술자들이 수년 동안 쌓아올린 건물이라고 한다.

일본인이 많이 투숙하는 로얄호텔을 바라보고 명동성당을 향해 경사로를 오르면 주위는 좀 차분해진다. 일제강점기는 물론 광복 이후 점철된 궁핍의 시대를 거치며 사람들은 어디서도 찾기 힘든 위안 같은 것을 여기 명동의 불빛 아래서 구했던 것 같다. 지금 이 풍요의 시대에도 무언가를 갈구하는 그 눈빛들은, 100년 이전에도 거기 있었던 성당의 높은 십자가 언덕 아래 밝은 상점들이 십자로를 가득 메우고 있다. 갑오년의 이 투명한 가을날 오후에도.

‘경성 모던타임스’ 저자

이미지 크게보기 서울 명동의 번화가. 간판은 영어가 주류를 이루지만 보조간판과 안내문은 중국어가 득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