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이제훈 초록우산어린이재단 회장이 지난 19일 서울 중구 무교동 재단 건물 옥상에서 ‘우산’을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곽성호 기자 tray92@munhwa.com

이제훈 초록우산어린이재단 회장

자기 방을 갖고 싶지 않냐는 질문에 비가 새지 않는 집에서 살고 싶을 뿐이라는 전북 익산 김예슬(13·가명) 양은 다 쓰러져 가는 판잣집에서 산다.

예슬이 집은 여전히 재래식 화장실을 사용하고 있고, 천장에서 쥐똥이 떨어지는 데다 장롱 밑에선 바퀴벌레, 개미, 지네 같은 벌레들이 기어 나와 여섯 남매를 물어뜯는다. 6남매 몸은 온통 벌레 물린 자국으로 얼룩투성이이고….

문화일보 8월 20일자에 실린 ‘쉴 곳 없는 아이들에게 집을’ 시리즈에 소개된 사연이다.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은 예슬 양 같은 어려운 처지의 어린이들에게 후원자를 찾아주는 일도 한다.

재단을 책임지는 이제훈(74) 회장을 지난 19일 서울 중구 무교동 어린이재단 사무실에서 만났다.

“불교에 무재칠시(無財七施)라는 말이 있는데, 가진 게 없더라도 남한테 베풀 수 있다는 뜻입니다. 현재 세상은 어른이 움직이지만 다음 세대의 주인공은 아동들인데, 아동에 대해 관심을 갖고 행복한 환경에서 자라도록 하는 것이 어른의 역할입니다.”

그가 언급한 무재칠시는 부드럽고 정다운 얼굴로 남을 대하는 ‘화안시(和顔施)’, 말로 얼마든지 베풀 수 있다는 ‘언시(言施)’, 마음의 문을 활짝 여는 ‘심시(心施)’, 편안한 눈빛으로 베푸는 ‘안시(眼施)’, 공손한 태도로 돕는 ‘신시(身施)’, 자리를 양보하는 ‘상좌시(牀座施)’, 상대방의 속을 헤아려 알아서 돕는 ‘찰시(察施)’ 등이다.

가진 게 없어서 나눌 수 없다는 말은 잘못됐고, 누구나 작은 마음으로라도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 같은 무재칠시의 대표적인 예로 고인이 된 철가방 김우수 씨 이야기를 했다.

이 회장은 “고아였던 김 씨는 어린 시절부터 소년원, 감옥을 드나들다가 감옥에서 불행한 사람이 다른 아이를 돕는 스토리가 담긴 책을 읽고, 출소 이후 중국집 배달일을 하면서도 매달 10만 원씩 어린이를 돕겠다며 재단으로 찾아왔다”면서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해 숨졌는데, 가족이 없어 재단 후원회장인 최불암 씨가 상주 역할을 하고, 재단이 장례를 치렀다”고 말했다.

김 씨와 같은 재단 후원자들의 경제적인 도움으로 꿈을 키워가는 아이들은 현재 국내 아동 5만8000여 명, 해외 23개국 아동 2만7000여 명이나 된다.

재단 후원으로 어려운 환경을 딛고 꿈을 이룬 경우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 오디션프로그램을 통해 일약 스타덤에 오른 최성봉 씨도 재단의 도움이 인생을 바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 회장이 소개한 최 씨 스토리는 이렇다. 태어나자마자 버려진 최 씨는 고아원에서 4살까지 지내다 5살 때 고아원을 뛰쳐나와 길거리에서 생활했다. 조직폭력배들에게 휘말려 죽을 고비도 수차례 넘겼다. 그러다보니 14∼15살까지 자기 이름이나 나이도 몰랐다가 포장마차 여주인이 재단에 최 씨 사연을 알렸다.

재단 사회복지사들이 도와주겠다고 나서면서 최 씨는 검정고시로 중학교를 통과하고 대전예술고에 진학했다. 고교 3학년 때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가 ‘넬라판타지아’를 불러 은상을 받았고, 최 씨의 인생 역전 스토리가 미국 ABC 방송까지 소개되면서 유명해졌단다.

이 회장은 재단 일에 굉장히 큰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그는 “어린이재단을 통해 불우한 아이들,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던 아이들의 꿈을 살려가는 보람이 아주 크다”면서 “이런 일들이 가능하게 도와주는 후원자들이 가장 고맙다”고 강조했다. 이 회장은 “3만 원, 4만 원, 5만 원씩 정기적으로 후원해주는 사람이 27만 명쯤 된다”면서 “이런 분들이 있으니 어려운 아이들을 찾아서 도울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회장은 원래 언론인 출신이다. 1992년 중앙일보 편집국장을 지냈고, 1995년에는 삼성그룹 회장 비서실 부사장을 거쳐 중앙일보 발행인 대표이사도 했다. 중앙일보 대표이사였던 2001년 초록우산어린이재단 이사가 되면서 재단과 인연을 맺었다. 어린이재단 회장은 2010년부터 맡고 있다.

언론인이었다가 봉사 활동에 적극 나서게 된 계기가 궁금했다.

―취재를 하면서 어려운 이웃을 많이 접하게 돼 도우며 살면 좋겠다는 생각은 많이 하지만, 실행에 옮기는 것은 쉽지 않은데, 적극적으로 봉사활동을 하게 된 계기가 있습니까.

“1990년대 다녔던 신문사에서 자원봉사 캠페인을 많이 했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지게 됐습니다. 자원봉사는 지난 2002년 월드컵 때 외국 관광객들이 많이 오니까 통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께서 BBB(Before Babel Brigade) 캠페인을 제안했어요. 바벨탑 시기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뜻인데,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들을 자원봉사자로 받아서 전화를 통해 통역해 주는 봉사활동이었죠. 그때 자원봉사 운동에 깊숙이 관여하면서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됐죠. 이후에 자원봉사센터 이사장도 하게 됐고, 자원봉사협의회 공동대표, 상임대표 같은 걸 많이 맡게 됐어요.”

이 회장은 “언론사에 있을 때는 사회의 잘못된 것, 앞서가는 정보, 잘못된 것을 지적하고 새로운 정보를 알려주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보람을 느꼈는데, 지금은 사회의 근본적인 갈등 해소, 양극화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결국 국민 차원의 자발적인 나눔문화, 봉사문화가 꽃피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자원봉사에 대한 생각이 남다른 것 같은데요.

“우리가 잘 되려면 나눔과 배려가 필요해요. 사회지도층이 굉장히 중요하죠. 그래서 노블레스 오블리주 운동을 많이 했어요. 자원봉사 활동을 계속하면서 나눔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킬 필요성을 느꼈어요. 나눔과 봉사 문화를 잘 발전시키는 것, 이것이 사회가 발전하는 지름길이라는 소신을 갖게 됐죠. 나눔과 봉사는 사회지도층이 신뢰받고, 부자들이 존경받는 길입니다. 그런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데, 이를 통해 공동체 문화가 만들어집니다.”

그는 “정부 출범 때마다 양극화, 불평등, 사회갈등 문제 해소를 위해 온갖 지혜를 짜내지만, 한계가 있기 마련”이라며 “유토피아적 이론으로 보면 공산주의 체제가 되면 사회가 굉장히 평등사회가 될 것이라 생각하지만, 인간의 본능과 기본적 구조를 외면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회장은 “결국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얼마나 더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협력하느냐에서 해답을 찾아야 하는데, 나눔과 봉사가 정답”이라고 힘줘 말했다.

이 회장은 “어른이 되는 것은 결혼을 한다거나 나이를 먹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을 제대로 도울 때, 아이를 도울 수 있는 위치가 됐을 때 어른이 되는 것”이라며 “최근 남을 돕는 진정한 어른이 되자는 취지로, 어린이와 어른을 합친 ‘어른이날’ 캠페인을 벌이는데, 반응이 좋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아동 교육 문제에 관심을 많이 기울이고 있다.

“요즘 병영 사고가 많은데, 어린이 교육을 잘 하면 막을 수 있어요. 그러기 위해선 선생님들이 존경을 받아야 해요. 문화일보에서 ‘좋은 선생님’ 기획을 하던데, 정말 의미 있고 좋은 기획입니다. 제가 만약 언론사에 계속 근무했다면 이런 기획을 했을 것 같아요.”

이 회장은 최근 사회문제로 부각됐던 병영 내 가혹행위 등 문제와 관련, “가정에서 밥상머리 교육을 제대로 못하거나 안 하다보니 아이들이 귀여움만 받고 자라 어려움을 이기려는 의지는 키우지 못하면서 남을 배려하는 마음도 적고, 사소한 일에도 자존심에 상처를 입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 회장은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외롭게 자라면서 아동 환경이 굉장히 나빠지고 있다”면서 “혼자 컴퓨터로 폭력성 있는 게임을 하게 되고, 인간적인 나눔과 사회성을 키울 수 있는 환경이 되질 않아 정서적으로 예전보다 훨씬 메마른 환경에서 자라게 된다”고 지적했다.

초록어린이재단은 지난해 학교 폭력과 왕따 등 아동·청소년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인성교육 콘텐츠 개발과 교육 지원 사업을 역점 사업으로 추진했다.

이 같은 맥락에서 추진한 드림오케스트라도 반응이 좋다. 음악적 재능이 있지만 이를 계발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던, 시설에 있는 아이들 또는 기초수급대상 어린이들이 참여한다. 전국에 10개의 드림오케스트라를 만들었다.

이 회장은 “지금 3년째인데, 목포드림오케스트라는 40∼50명으로 시작해 지금은 250명 정도로 커졌다”며 “음악을 통한 힐링 효과도 있다 보니 우울해 하던 아이들이 자신감도 얻는 등 성과를 내고 있다”고 자랑했다.

그는 정부가 어린이에 대한 관심을 더 기울여야 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이 회장은 “지금 세상은 어른이 움직이지만 다음 세대의 주인공은 아동들”이라며 “노인복지는 굉장히 적극적으로 늘려가지만, 아동 복지는 표가 안 되니까 예산이나 정책적인 지원은 아주 열악한 상태인데 정부가 아동 문제에 대해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장석범 기자 bum@munhwa.com